미술공예운동에 관하여
1. 미술공예운동의 발단과 시대적 배경
영국에서 19세기에 일어났으며 산업혁명의 물결속에서 가구 등의 일용품과 건축시장에 범람하기 시작한 값이 싸고 저속하며 조합한 기계생산 공예품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 이 운동은 기계를 부정하고 중세시대의 수공예 생산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장. 기계의 추악하고 퇴폐적인 측면을 비판하였으며 반기계라고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측면을 옹호
수공예 부흥의 대표적인 선구자 윌리엄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시인이자 사회개혁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90~1900)과 고딕 부흥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퓨진(A.W.Pugin)의 영향을 받음. 모리스는 161년 마샬 포크너 상회(Morris, Marshallm, Frulker Co)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질이 높은 벽지, 염색직물, 스테인글라스, 양탄자, 실내장식품 등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제작. 이 당시 미술공예라는 명칭이 미술공예 전람회협회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최초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수공예에 의해서 생산한 제품이 기계에 의해서 생산된 제품보다 값이 매우 비싸며 수공에 의존하다 보니 소량만이 생산가능하므로 대중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기계에 반발하였으나 이 운동은 현대예쑬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 이것은 아르누보, 반데벨데 헤르만 무대지우스라고 하는 독일건축가에 의해서 독일에 소개되고 미술, 공예, 건축이라는 3가지 상관된 개념이 그에 의해서 종합되어 1907년에 창설된 독일공작연맹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게 된다.
2. 미술공예운동
예술활동의 중요한 부분과 19세기 후반의 사회주의적 사고를 지배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 걸쳐서 장식미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도 함. 형태와 모양은 단순하고 평범하며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로 제작. 양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식은 제작과정에서 주어진 것. 자연의 식물, 새, 동물의 형태들은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며 대가로 간주되고 있는 윌리엄모리스는 직물, 벽지 디자인에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으로 평평하고 2차원적인 양식화된 패턴속에서 형태들을 사용하였다.
1880~1890년대에 활동하였떤 미술공예운동의 제2세대 작가들의 작품중에는 아르누보의 길을 개척한 센츄리(Centry Guile)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역동성과 움직임이라는 눈에 띄는 요소와 보다 추상화된 특징이 존재. 이러한 장식유형의 특징은 윌리엄드 모르강, 월터 크레인 찰스 애쉬비 등. 이들은 장인과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우월하다고 믿고 기계로 만들어진 것보다 손으로 만든 제품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 일부는 기계를 거부하였고 기계가 적절히 사용된다면 사회에 이익을 주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따.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사상을 토론하면서 각자의 체험을 공유하였고 이 그룹이 중세 사회에서 특출한 부문이었던 중세의 장인길드(craft guild)였다.
이들은 삶의 질을 개선시키고 고양시키며 예술적 교류가 창조자와 고객 모두에게 높은 품위를 부여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따. 장인은 예술가로 이해외었으며 예술행위 그 자체는 사회 속에의 선을 위한 긍정적인 힘을 고취시키고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3. 미술공예운동의 특징
1) 이념적으로는 사회적, 도덕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치있는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유래하였떤 것으로 윤리적인데 관심을 집중한 운동
2) 예술적 직업인의 부흥이 근대적 생산방식을 반대하는 쪽으로 강하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공예운동은 근대화 운동의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반근대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3) 민중을 위한 제품생산이라는 미술공예운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기계문명을 배제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시대착오적 모순 속에 이 운동의 한계점이 있음
4) 역사주의는 당대 예술가들이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려는 진취적 자세보다는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고 부흥하며 재현시키는 절충주의적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이 대부분
5) 수공예를 강조하여 대중 예술을 주장하였으나 미술공예운동이나 기업활동을 통해서 만든 생활품은 기계제품보다 저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함
4.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896)
영국의 비평가, 저술가, 미술운동가, 1837년 옥스포드 크리스트 처어치 컬리지 졸업
1843년 풍경작가를 옹호하는 '근대 건축가들'을 발간했으나 많은 비평을 받음. 이책은 화려함과 예술에 대한 독창적인 접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849년 '건축에 있어서의 일곱가지 요소'와 1851~53년에 출간한 '베니스의 돌'은 둘 다 러스킨을 예술비평의 대가로 명성을 얻게 했으며 그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글이 되었다. 러스킨은 옥스포드 대학교수를 지내면서 강의내용을 묶은 많은 책을 편찬,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술에 대한 설득력있는 견해를 수립
<비난> 공업이 확립된 기존가치를 격하시키고 지방, 읍, 도시에 추악함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보았다
<비평> 미학과 윤리학을 하나의 동전의 양면으로 보았다. 중세의 수공예 전통을 재확립한다면 그의 시대가 공업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 공업화는 파괴적, 부정적인 것이었다
<주장> 인간의 생각은 다른 인간의 손으로 실현될 수 있거나 실현되어야만 한다는 점과 손에 의한 작업이 지성에 의해 지배되면 긍급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고가 서로 분리되어 가는 경향이 증대되고 있음을 한탄하였따. 사고와 노동을 결합시킴으로서 공예가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가는 항상 공예가이어야만 한다고 주장
5.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
<목표>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제품을 수공업의 형식으로 제작. 런던의 레드 라이온 스퀘어에서 운영되었고 신고딕 및 중세양식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하고 제작
<범주> 모리스가 공식가구라고 부르던 것은 장엄하고 정교하며 반면에 일상가구라고 묘사하였던 유형은 극도로 단순한 것이다. 부유층의 지나친 사치심을 조장하리라는 측면을 인정하였떤 공시가구 모든 효과들이 퓽요로운 상태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윌리엄 드 모르강> 모리스의 친구이자 동료이며 그는 미술공예운동의 이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고 도자기사업은 모리스의 도자기제작에 기여. 주로 사용하는 모티브는 꽃, 식물, 동물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신화적이고 문장학적인 동물, 고대 북유럽의 영웅이야기의 낭만을 상기시켜 주는 범선들도 그의 디자인에서 적절히 사용되고 있음
7.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시인, 공예가, 사회개혁가, 옥스포드 대학 재학중 옥스포드 앤 캠브리지 매거진을 발간
존 러스킨으로부터의 영향과 중세성당에 대한 열광으로 모리스는 건축사무소에 들어가나 회화로 방향을 전환. 1857년 번 존스와 함께 런던에서 스튜디오를 개설, 이 스튜디오에서 이들은 기성 가구와 직물의 모양에 반기를 들고 그들 스스로 필요한 집기와 가구를 디자인하고 제작했으며 텍스타일 또한 직접 제작. 근대 취향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혁명의 하나가 됨. 1861년 번 존스. 매독스 브라운. 필립 웹 등의 도움을 받아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설립. 모리스는 후세인들로 하여금 예술과 공예가 산업화함에 따라 뒤따르는 저속, 저급의 디자인을 무용화시킴으로서 어떤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