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공공디자인에서 중요한 문제는 클라이언트의 문제. 공공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은 늘 대중이 소비하는 것임에도 대중 자신이 직접 비용을 지불하거나 일을 맡길 디자이너를 고르지 않는다는 것. 일반적인 자본주의 논리에서의 디자인은 늘 구체적인 클라이언트가 상정되었는데 공공 디자인의 클라이언트가 되는 관공서 같은 곳은 디자인 결과물의 죄종적인 소비자가 아니면서도 디자인 과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
공공디자인은 우리에게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요. 소수의 행정가, 정책입안자가 공공 디자인을 통해 디자인에 대한 공론화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현 상황은 좋건 나쁘건 디자인계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
시민사회는 이제 계몽주의 시대를 벗어나고 있는데 국가는 다시 계몽주의를 하며 강한국가를 지향하고 있는게 아이러니. 지금의 공공디자인은 일반인들의 의견 제시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21세기형 새마을 운동. 관공서에서는 서구화되어 있는 공공 디자인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수십년 동안 만든 것이라는 것은 벤치마킹하지 않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자 함. 따라서 시간이 부족하여 시민들의 참여가 불가능하고 디자이너들은 공공 디자인을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시장이 생겨 난 것으로 인식. 디자인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관공서라는 블루오션을 발견하게 된 것으로 여김. 요약하면, 국가, 시민, 디자인계라는 세 주체가 있는데 국가는 디자인을 선진화의 고두, 계몽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서구의 훌융한 사회를 벤치마킹해서 우리의 문화적 고려없이 단순이 이식시키거나 이종교배시키려고 하고 시민들은 개인적 소비감각은 높아졌지만 공공영역의 시민의식은 여전히 약하며, 디자인계는 관공서를 단순한 클라이언트로 이해하고 공동 디자인에 대한 의식은 미확립
시민들의 디자인 참여가 시민들이 직접 디자인하는 것을 가키리지는 않음. 일반적으로 시민들은 소비를 함으로써 디자인에 참여하지만 공공디자인은 그럴 수가 없다. 만들어놓으면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면에서 권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디자인은 결국 민주주의 문제로 귀결. 공공디자인이 그 사회의 삶과 문화의 문제라고 할 때 여기서 시민의 주권과 참여라는 것은 시민들이 스스로 살아갈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임
공공디자인은 복지의 문제이기도 함. 지금까지 복지는 수량화된 복지였으나 공공디자인은 문화적 삶에 관련된 측면으로서의 새로운 디자인적 복지. 공공디자인이란 관이 의식하건 그렇지못하건 간에 시민적 삶과 관련된 복지의 한 양상
공공디자인에 대한 담론시에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든지 지속가능한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이런 논의의 실상은 상당히 과시적인 것. 장애인을 위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곤 하는데 서울시 지하철의 경우는 선진국과 비교해도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장애인의 엘리베이터 이용률은 떨어지는 편이며 심지어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보장해달라는 운동마저 하고 있는 상황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용할 때의 상황을 세세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 마약 정말 장애인들을 위한다면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것보다 장애인 전용 택시를 운영하는 등의 제도로, 장애인이 타기 편리한 수다능ㄹ 제공하는 사회적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는 편이 낫다. 지하철은 애초부터 장애인이 이용하기엔 한계가 많은 시설물인데 거기에 무턱대로 엘리베이터만 많이 설치하는 것은 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임 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사회에 여유가 생기고 나니 장애인 문제는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 이런 갈등은 사회 어디에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건물을 내진설계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가장 시급한 주택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엔 그런 걸 고려하지 않고 집을 지었다. 우리 디자인도 과거에는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해서는 그저 관념으로만 머물렀음. 어쩄든 이 공공성은 현실적으로 지금의 공공디자인 행위와 관련. 따라서 공공디자인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지금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공공디자인의 문제는 디자인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이 부분에선 우리가 아직 저급한 수준. 시민사회가 더 성숙해져야 한다. 여전히 국가 주도의 경향이 강력하기 때문에 공공디자인 또한 위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 주도의 디자인 진흥 상황에서 국가에 의한 디자이너의 동원, 지금도 제2의 동원이 이뤄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은 산업에 대한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에 대한 학습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 결과 상당수 디자이너가 산업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이 무엇이 다르냐, 책상을 디자인하는 것과 거리의 휴지통을 디자인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다. 게다가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 디자인계 내부에 오피니언 리더가 없는 것도 큰 문제. 공공 디자인이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올바르게 방향을 제시하는 디자이너가 없고, 오로지 정치하는 디자이너, 다시 말해 폴리 디자이너(poli-designer)만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
우리 디자인계는 사회 선진화의 책임이라는 과부하가 걸려있다. 그리고 이를 굳게 믿는 일군의 디자이너들이 있다. 그들은 옛날 산업공단이 그랬던 것처럼 디자인이 산업의 역군으로서 나라 전체를 선진화할 수 있다고 맹신하고 있다. 그들은 조국 선진화의 수단으로 공공디자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현실. 여기서 공공디자인의 이데올로기가 선진 조국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해버린다. 디자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이 절실. 지금의 공공디자인이 지닌 진정한 함의는 사회와 우리 디자인계에 '디자인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던진 것
지금 한국디자인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철저한 현장 무관심주의. 디자인은 구체적인 결과물을 생산하는 행위인데 이런 사실 자체가 외면당하고 있다. 한국 디자인의 현실과 현장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디자인을 문제삼는다. 그 구체적인 한가지 예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은 디자인 정책이다. 실제적인 디자인 결과와 현장을 무시한 채 바로 담론이나 공론으로 비양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디자인 상품이 된다.
산업디자인과 공공디자인은 다르다. 상업적인 디자인은 각각 독립적인 장르로 다룰 수 있다. 그런데 벤치를 디자인하려면 조경과 건축, 공간 문제가 다 걸리기 때문에 장르간의 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폴리 디자이너의 올바를 방향은 정치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인 정책가로서 장르간 융합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시스템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 여러 디자인 조직이 생겼지만 정작 거기 있는 사람들은 순환보직체계이다. 행정에서 이런 방식이 굳어져 있으니 디자인장르를 융합하려 해도 문야 간의 관리 부서가 달라서 힘들다. 도시 디자인의 모범사례중 하나로 꼽히는 요코하마의 미나토미라이 21 담당자는 신입공무원일때부터 늙을때까지 한부서에서 근무. 관공성의 공공디자인 담당자란 사람은 이렇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근무하며 전문가들이 일할 수 이쓴 환경을 지원해주는 게 필요
디자인 교육현장에서도 장르 간 소통하거나 융합하는 훈련은 전혀 안되고 있다. 공공디자인에서의 장르적 융합이란 시각 디자인과 공간 디자인 간의 통합 같은 좁은 범위에서의 디자인 간의 융합이 아니라 건축, 패션, 인지공학, 새로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 등 다차원적인 분야를 포함.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어떻게 융합할 것인지를 디자인정책으로 수립해야 한다. 단순히 쓰레기통을 깔끔하게 디자인하고 가로등을 멋있게 하는 정도의 표면적인 결과만 내놓고 공공디자인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곤란
공공디자인은 현실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한국 디자인에 강한 질문을 던진다. '디자인은 실천'이라는 실천의 중요성을 점점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최근 디자인에 대해 생산되는 담론들은 실제 현장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고 추상적이다. 유행적으로 통용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대해서도 무엇이 우리 디자인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었는지 아무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추상적 관념에 불과. 디자이너에게 많은 통찰력과 비전에 대한 갈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야말로 공공디자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월간디자인_공공디자인 열풍, 무엇이 문제인가